나의 아버지와 다름없는 판사님

나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시지만 지나가버린 시절들의 기억의 파편들을 통해 나의 삶에 늘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나도 지금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이 세상을 떠나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란 누구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이러한 질문에 관해 깊이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아버지의 존재 의미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아이가 있다. 바로 상희라는 소녀다.

 상희의 부모는 상희가 열 살 무렵부터 별거하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이혼을 하였다. 상희는 열다섯 살 때 폭력 등으로 가벼운 소년보호처분을 받았으나 그 준수사항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몇 달 뒤 의료소년원에 보내지는 7호처분을 받았다.

상희는 의료소년원에서 나온 뒤 한 동안 별다른 말썽 없이 생활하였으나 열일곱 살 무렵 다시 비행세계로 빠져들었다. 중학교조차 마치지 못하고 변변한 기술조차 가지고 있지 않는 상희가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을 나온 상희는 절도나 성매매를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였고, 심지어는 걸인의 구걸통에 있던 돈마저 훔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상희는 열여덟 살 때 나에게 재판을 받았었다. 당시 심리는 법정에서 하지 않고 판사실에서 하였다. 간혹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판사실에서 재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희가 임신 4개월을 맞는 임산부라고 하기에 충격을 받을까봐 차갑고 권위적인 분위기의 법정보다는 판사실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재판을 하면서 차도 한 잔 대접하였다. 당시 상희의 비행은 소년보호처분 중 가장 무거운 처분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되었지만, 상희가 임신을 하고 있는 터라 부득불 2년간의 보호관찰을 조건으로 어머니에게 돌려보내는 처분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간 상희는 낙태수술을 받았다. 그 상처 때문인지 상희는 다시 가출하여 노래방도우미 생활을 하는 등 보호관찰처분에서 정한 준수사항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결국에는 다시 붙잡혀 열아홉 살의 나이에 나에게 두 번째 재판을 받게 되었다. 2012년 11월에 상희에 대한 심리가 열렸다. 국선보조인이 상희가 쓴 편지라며 제출하기에 편지를 받아들고 읽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경하는 천종호 재판장님”이라는 첫 글귀를 읽는 순간 나는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경하는 천종호 재판장님께 이 편지를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상희입니다. 이렇게 판사님께 편지를 쓸려고 하니깐 벌써부터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요.

저는 살아오면서 정말 행복했던 추억이 없습니다. 슬프고 괴로웠던 일뿐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항상 외로운 아이였습니다. 정말 그 누군가에게도 사랑을 못 받고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고 하다 보니까 결국엔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그 누군가 단 한 명도 저에게 손내밀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 제 자신을 뒤돌아봤는데 제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온통 세상이 어둡고 컴컴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이제 낭떠러지에 왔구나.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난 거구나.’ 생각하고 인생을 포기 하려고도 했습니다.

…

지금까지 저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고, 숨을 쉬고 있는 게 숨을 쉬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판사님 저는 정말 나쁜 아이가 아닙니다. 정말 잘 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간절합니다. 판사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를 한번 만 믿어주세요. 너무 힘들고 또 힘들었습니다. 너무나 괴롭고 또 괴로웠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마음가짐으로 살겠습니다. 저는 지금 그 누구보다 간절하고 또 간절합니다. 부탁드립니다. 평생 숙이면서 남들 도와가면서 사회에 봉사하면서 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꿈을 향해서 달려 가보고 싶습니다. 이제는 성공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어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

나의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봉사하겠습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정말 이제는 후회 없는 마지막 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믿어주세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평생 죄송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다시 한 번만 선처 부탁드립니다. -상희 올림-

편지를 읽은 뒤 상희에 대한 심리를 열었다. 상희가 편지를 쓴 가장 큰 이유는 소년원에 가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희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희에 대해 6개월간 소년원에 보내는 9호처분을 내렸다. 소년원에 2년간 보내지는 10호처분을 받지 않은 탓인지 상희는 담담하게 처분을 받아들이고 법정을 나섰다.

재판을 마치고 상희가 쓴 편지로 인해 나는 상념에 빠졌다. 상희의 편지에는 나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만 언급이 되어 있다. 상희가 편지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은 반면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나를 아버지와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언지가 궁금해졌다. 첫 번째 재판 때 나에 대한 인상이 깊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을까? 아버지라는 존재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나를 두 번씩이나 아버지와 다름없다고 하였을까? 과연 상희에게 있어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아버지! 참으로 쉽고도 어렵게 얻어지는 이름이다. 자녀를 낳는 순간 아버지가 되므로 아버지라는 이름은 쉽게 얻어진다. 하지만 자녀에게 아버지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아버지라는 이름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기 힘든 것이 되어버린다.

제대로 된 아버지노릇이란 무엇인가?

가장 근본적인 아버지노릇은 자녀를 보호하는 것이다.

보호자는 자녀가 태어나서 자립할 때까지 자녀를 양육하고 지켜주는 자를 의미한다. 법률상으로는 보호자는 미성년인 자녀에 대해 친권을 행사하고 양육하는 자를 의미한다. 보호자의 역할은 자녀의 생존을 책임지고 안전을 지켜주는 것을 넘어 정신적으로 보호해 주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인간이란 빵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보호자로서의 아버지노릇은 아버지로서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의무다. 보호자의 역할은 법적으로는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수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기간이 너무 길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아버지노릇으로는 멘토 역할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멘토를 필요로 한다. “멘토란 우리를 안내하고 보호하며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을 체화한 사람이다. 멘토는 우리의 상상력을 고취시키고 욕망을 자극하고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기운을 북돋워준다. 멘토는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할 때 나타나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대부나 대모와 같다.”(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멘토로서의 아버지는 스승, 코치, 상담자, 페이스메이커(pacemaker), 보증인, 정신적 지주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끝으로, 아버지는 정신의 뿌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버지는 자녀라는 존재가 가능하게 한 뿌리, 자녀의 인격의 밑바닥에 닿아 있는 뿌리, 자녀의 사유의 세계에서 뽑아낼 수 없는 질긴 뿌리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끼친 영향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녀의 영혼 속에 뿌리박고 있다가 자녀의 삶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버지의 삶이 자녀의 정신에 쓴 뿌리가 되어 있다면 자녀의 삶은 행복해지기 어렵다. 자녀에게 있어서는 아버지의 존재는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존재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정신의 뿌리로서의 아버지노릇은 죽어서도 끝나지 않는다. 자녀에게 쓴 뿌리가 되지 않으려면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겨두어야만 한다. 그래야 죽어서도 아버지노릇을 제대로 할 수가 있다.

우리들이 사는 세계에는 수십억 명의 아버지가 있고, 그들의 아버지로서의 삶은 아버지노릇여하에 따라 너무도 제각각이다. 때문에 ‘이것이 아버지다’ 라고 말하며 단일한 아버지상을 만들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로서의 보편적인 삶은 그려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중 보호자로서의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로서의 보편적인 삶에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비행소년들의 아버지 중에는 최소한의 아버지노릇인 보호자 역할조차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로 인해 절망하는 소년들을 많이 보아 왔다. 비행소년도 대한민국의 소년들이다. 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이 사회의 어른들 중 누군가는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어야 한다. 그들을 보호해주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아픈 마음을 위로해 주며 삶의 길잡이가 되어 줄 아버지가 그들에게도 필요하다.

상희도 비록 자신이 비행을 여러 번 저질렀지만 그에 대해 질책하기보다는 오히려 보호해주고 자신의 아픈 마음을 이해해 줄 아버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간절한 마음에 자신에 대한 처분을 내려야 하는 판사인 나를 아무런 스스럼없이 아버지와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상희를 비롯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비행소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진다. 나라도 그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해주고 싶지만 여건이 잘 허락하질 않는다. 상희가 지금쯤 소년원에서 나왔을 것인데 이 글을 보고 얼른 연락이라도 해 주면 좋겠다.